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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증인(행1:1~8)
2017년 8월 27일 주일말씀 김재형형제
중심부 10순 김재형입니다. 교회에 산다는 것은 정말 은혜로운 일이다. 내가 이런 자리에도 서보고 특별한 은혜를 누리가 되어서 교회 앞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항상 뒤에만 있다가 교회 건물 짓고 처음 앞에 나와 서 보았는데 우리 형제자매들 얼굴을 마주 대하고 보니까 너무 감사하고 좋다.
우리는 영원한 한 가족이다.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서로 사랑하고 서로 연합해서 함께 하게 되었는지 너무 감사하다. 많이 긴장되었는데 노래를 듣고 나니까 조금 낫다. 긴장은 별로 안 되는데 손에 땀이 많이 난다.
어제 양문회 모임을 했다. 양문회 학생 중 한 명이 초등학교 5학년 때 우리교회어린이 교회를 다녀왔는데, 부모님이 오늘 교회에서 뭘 들었는지 물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5학년 학생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해주시는 분이 아니고, 우리의 생명이 되시는 분이라는 말씀을 들었다는 것이다. 오늘 말씀 드리려고 실컷 준비했는데 초등학교 5학년이 벌써 알고 있었다. 굉장히 부담이 많이 되었다.
지금 복음전파가 우리 교회의 화두가 되었다.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 <너희는 내 증인이 되어라.>고 하신 말씀을 한 번 살펴보고 싶었다. 사도행전 1장 1절부터 8절까지 읽고 말씀 드리도록 하겠다.
[사도행전 1:1~8]
“1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3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6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말씀 노트를 만들었는데 순서가 바뀌게 말씀을 드릴 것 같다. 편하게 들어주시고 나중에 말씀 노트를 한 번 읽어보시면 될 것 같다. 뒤쪽에는 참고 되는 성경구절을 적어놓았으니 참고하시면 된다.
사도행전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서 하나님 경륜을 대략적으로 한 번 말씀 드리겠다.
하나님은 인생을 축복 가운데서 지으셨다. 이 축복은 생명의 축복이었다. 생명의 하나님은 생명을 창조하셨고,사람으로 하여금 그 생명으로 말미암아 살도록 하셨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어진 사람은 만물을 다스리도록 직임을 받았는데, 그것은 생명나무 열매를 먹음으로 말미암아 가능한 일이었다.
그 생명나무 열매는 하나님 자신의 생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이 생명만 먹으면, 하나님과 함께 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만물 중에서 가장 귀한 자이고,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자였다.
그런데 사탄의 속임으로 말미암아서 사람은 위치를 떠나게 되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게 되었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생명의 공급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생명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사람을 찾기 위해서 구약의 많은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려 하셨고, 마침내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로 오시게 되었다.
예수님은 바로 참 사람의 위치를 회복하셨고, 하나님 아들로서 온전한 관계를 회복하신 것이다. 예수님 자신 안에 있는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을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시려고 하셨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받을 수 없었고 예수를 오해했고 십자가에 넘겨주고 마침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고 말았다. 제자들도 다 도망 가버렸고,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이 세상에 아무도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 없었고,예수님에게 생명을 분배받은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부활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다시 찾아오셨다. 하지만 그때도 제자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여기까지가 창세기 1장 1절부터 사도행전 앞까지의 상황이다.
너무 요약이 간단했나? 이제 서론이었다. 배경인 도입부를 했다. 이제 사도행전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겠다.
사도행전은 마가라는 사람이 썼다고 한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임인 4복음서와 로마서로 시작되는 서신서들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4복음서는 예수님의 생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이야기다. 서신서들은 대개는 바울이 썼는데 교회에 관한 내용이다.
예수님의 이야기와 그리고 예수님이 죽으시고 나서 교회에 그 사이에 사도들의 이야기가 바로 사도행전이다.
나는 의문이 생겼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제자들은 세상으로 돌아가 버렸다. 왜 돌아갔을까?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살아계실 때 책을 한 권 쓴 것도 없다. 녹음 파일을 남긴 것도 없다. 동영상 파일을 남긴 것도 없다.
예수님은 오직 제자들을 남겼다. 그것마저도 12명 중에 한 명은 죽어버리고 11명밖에 없다. 이 제자들이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상태로 다 뿔뿔이 흩어져 고기 잡으러 다시 세상으로 갔다.
예수님은 완전히 실패한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 영화(드라마)는 반전이 생기는 것일까? 영화를 보다보면 주인공이 막 두들겨 맞는다. 그런데 갑자기 신기한 무기를 꺼내거나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여 다시 적들을 두들겨 패기 시작한다. 그러면 우리는 신이 난다.
이것을 반전이라고 한다. 영화에는 반전의 묘미라는 것이 있는데, 예수님은 도대체 어느 부위에서 반전의 드라마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는가? 속된 말로 이렇게 말해서 좀 불경스럽지만 나는 제자들이 도대체 정신을 언제 차리는가가 궁금했다.
제자들에 대한 말이 아니고 내 자신이 늘 이런 의문이 있었다. 언제 말씀을 알아듣지? 나는 언제 간증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나는 언제 한 번 제대로 살아보지? 그것이 궁금했다. 그래서 오늘 그 부분을 살펴보고자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40일간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셨다고 되어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최종적인 목표라고 할 수 있고, 지금 예수님은 죽고 사라질 것이다. 부활 승천하실 것이니까 이 땅위에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 상황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일을 말씀하신 것은 이제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루어야 하는 것은 제자들이기 때문에 제자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를 이루게 부탁하고 당부하고 마지막 말을 남기시는 것이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조차 제자들은 이스라엘 나라는 언제 회복되느냐고 물었다. 이런 것을 속된 말로 복장 터진다고 한다. 속 터진다. 지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다시 사시고 마지막으로 40일간 제자들과 함께 하는데, 아직도 제자들은 이스라엘은 언제 회복되느냐고 묻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 제자들은 어떻게 하나님 나라, 구체적으로는 당신의 교회였다. 어떻게 교회를 건축하게 되는가?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이 땅위에 오게 하는 것인가? 이 사도들의 행적이 이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다.
오늘 읽은 성경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아버지가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하셨다. 아버지가 약속하신 것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굉장히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아버지가 약속하신 것이 무엇일까?
구약의 요엘서에 그 힌트가 있다고 한다.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심판 전에 자신의 영을 사람에게 부어줄 것이라고 약속하시는 장면이 나온다.(요엘2:28-29)
이것은 자신의 영, 즉 하나님을 영을 부어주겠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예레미야서 31장 33절에 신약의 내용, 바로 새 언약의 내용이 기록되어있다. “하나님의 법을 사람의 속에 두고 마음에 기록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고 되어 있는가? 하나님의 영을 법을 사람의 속에 두고 기록해서 여호와를 누구다 알게 하겠다고 했다. 어린아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왜 그런 말이 나왔는가? 아무리 해도 모르니까 그랬을 것이다. 구약에 무수히 많은 선지자, 구약의 많은 율법을 지키고 따르고 했지만 그것으로 하나님을 알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하나님도 얼마나 답답했으면 참고 참고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마지막에 이제 내가 이스라엘로 새 언약을 세우리니라고 하신 그 내용이 바로 내 영을 사람들에게 심어주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새 언약의 본질인데, 이렇게 되면 하나님을 보게 되고 알게 된다는 것이다. 빨리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하나님의 영이 나에게도 빨리 와서 말씀도 잘 알아듣고 간증도 잘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약속만 하시고 이루어주시지 않는가? 약속할 것이 뭐 있는가? 바로 해주시면 되지 않는가? 내가 생각해보니까 하나님이 하늘에서 바로 사람들에게 꽂아주시면 될 텐데 아마 하나님도 못하시는 것이 있는 것 같다.
씨를 심으면 가지가 뻗고 잎이 열리고 꽃이 떨어지고 난 다음에 열매를 맺는다. 씨에서 바로 열매가 올 수가 없다. 하나님이 바로 우리에게 뭔가를 하실 수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신약의 성취, 새 언약의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 같다.
오늘날 하나님의 영을 사람에게 주겠다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이것이 지금 이제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1장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흥미진진할 것이다. 그 장면을 보려고 한다. 나만 흥미진진한 것 같다. 조금 자제하고 말씀 드리겠다.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제자들에게 자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고 했다. 그런데 영이요 생명이라는 이 말씀을 아무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우리가 식인종인가? 자기 살을 어떻게 먹고 자기 피를 어떻게 마시라는 것인가?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아무도 예수님의 생명을 받은 사람이 없다.
십자가에서 제자들은 다 도망가 버리고 말았다. 아까 말씀 드린 것처럼 겟세마네에서 같이 기도하자. 3번이나 깨웠는데도 기도할 수 없었다. 십자가에서 다 버리고 도망갔다.
베드로는 3번 부인했다. 3번 부인했다는 말은 완전히 부인했다는 말이고, 전혀 모르겠다는 뜻이다.
그런 제자들을 예수님이 다시 찾아오셨다고 했는데, 다시 찾아오셨을 때 어떤 모습이었을까? 부활한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부활은 굉장히 어렵다. 예수님이 죽기 전 그 모습과 똑같은 모습으로 찾아오셨으면 예수님이 살았네, 하고 쉽게 알아보았을 텐데 과연 예수님이 죽기 전과 똑같은 헤어스타일로 똑같은 수염 난 상태로 오셨을까? 누가 봐도 예수님이 왔네, 하고 보았을까? 모른다. 누가 알겠는가? 그 당시에 살아보지를 않아서 그 당시의 예수님을 보지 못했다. 아무도 모르는 것 같다.
성경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자신의 살아계심을 제자들에게 나타내시고 보이셨다고 했다. 나타나셨다. 보이셨다. 왜 그런가? 예수님은 죽었으니까 죽었으면 무덤에 있고 우리는 볼 수가 없게 된다. 무덤 문이 열리고 뚜벅뚜벅 걸어나왔는지 벽을 뚫고 나왔는지 어떻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예수님이 여기에 나타내셨다,나타나셨다. 그리고 보이셨다.
예수님이 죽었는가 살았는가를 보기 위해 예수님 무덤에 가서 무덤 문을 열고 살아나는지 기다려보자 하고 있으면 싸악~ 살아나는 것을 봤다는 말이 아니다. 죽었으니까 끝났다. 제자들은 가버렸다. 예수님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고 제자들도 다른 곳에 있었다.
그런데 그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나타나고 보이셨다. 이것이 부활의 모습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다 보았을까? 그 당시에 살던 모든 사람들이 다 부활한 예수를 보았을까? 제자들에게도 보일 때도 있었고, 보이지 않을 때도 있었다고 한다. 나는 잘 모르겠지만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기도 하고, 몰라보기도 했다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뛰어내리지 못하고 죽은 예수!
목사님이 수없이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들의 눈에는 분명히 죽은 사람이다. 이 죽었다는 말은 육체적으로 죽었기도 하지만 내용적으로 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우리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어머니도 돌아가셨는데 예수를 그렇게 죽었다고 생각하면 아무 의미가 없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그 죽으심은 육체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본질적인 죽음이다.
그것을 볼 때 사람들이 보기에 우리가 보기에 본질적으로 죽었다고 보인 것이다. 부끄럽고 창피하고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이다.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데 하나님이 대답이 없었다.
도대체 예수님은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예수님은 많은 말씀을 하셨고 많은 기적과 이적을 행하셨는데 이제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셨다는 것은 아마도 예수님도 입은 있는데 말은 못하는, 완전히 끝나버린 것이다.
살아있으나 죽은 사람이다. 살아있어도 죽은 사람이 있다. 육체가 죽었다는 것이 아니고, 그 내용이 죽었다. 모든 사람들이 보기에 십자가의 예수는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다시 살리셨다. 죽은 자들 가운데 두실 수가 없어서 하나님이 그를 다시 살리셨다. 이 살렸다는 말은 나는 잘 모르겠지만 물론 육체도 다시 살리셨을 것이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왜 살리셨는가? 살리셨다 함은 인정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참 사람이다. 사람이란 이런 사람이다. 피조물이란 이런 것이다. 완전한 피조물의 자리, 정말 진실한 한 사람이 거기에 나타났고 하나님이 거기에 도장을 딱 찍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 그 당시 인류, 아니 온 세상 사람들은 거역하고 불순종하고 높아지고 위대해지려고 했다.그 사람들의 눈에는 십자가 예수는 분명히 죽은 사람이었다. 끝났다. 침 뱉고 다 돌아섰다. 다시 안중에도 없다.다시는 그곳을 쳐다보지도 않겠다.
그런데 하나님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겠는가?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죽은 자였고,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는 살아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했다. 아담은 잘 먹고 잘 살았다.
그 잘 먹고 잘 산 아담이 계속해서 흘러와서 이 세상의 문명과 문화를 건설하고 이렇게 잘살고 있다. 죽었다고 생각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육체적으로 살았고, 육체적으로 살았다고는 하지만 내용적으로 자기는 죽었다고 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실직했으니까 나는 끝났다, 재산을 다 잃었으니까 나는 끝났다는 사람은 있다.
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처럼 그렇게 죽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나님이 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를 살아있는 사람으로 보시고 아마 이렇게 외쳤을 것 같다. 순전히 내 생각이다.
예수님이 운명하셨을 때, 큰 소리를 지르고 영을 포기하고 운명하셨을 때,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을 보고 이 사람을 봐라, 큰 소리로 외쳤을 것이다. 이 사람이 내가 지은 사람이다. 이 사람이 참 사람이다. 이 사람이 살아있는 사람이고 이는 내 아들이다. 사랑하고 기뻐하는 자다. 너희는 이 사람 말을 들으라. 이 사람만 보아라. 그렇게 외치지 않았을까? 아무도 못 들었지만...
십자가에 달린 한 사람을 두고 하나님과 선악과를 먹은 세상 사람은 완전히 반대편에서 그 한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제자들의 눈에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가 나타내고 보이셨다고 했다. 그 말은 그 사람이 살아있구나 하는 것이 보여졌다는 것이다.
여기가 반전 포인트다.
그 제자들의 눈에 절대로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눈에는 살았다고 보일 수가 없다. 완전히 완전히 죽은 것이다.그런데 살았다는 것이 보여졌다. 부활하신 예수가 나타내고 보여졌다는 말은 제자들의 눈에 그것이 보였다는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제자들의 눈에 이것이 보였을까? 한 사람씩 나와서 그것을 간증해주시면 좋겠다. 어떻게 보여졌을까? 나도 잘 모르겠다.
부활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육신의 정신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에베소서에 “지혜와 계시의 정신(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엡1:17).”라고 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지혜와 계시의 영이 있어야 된다. 하나님이 자기 법(영)을 사람에게 주어서 하나님을 알게 하겠다고 하셨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이 없다면 지혜와 계시의 영이 없다면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을 알 수 없고 볼 수 없다. 아무리 똑똑해도 아무리 잘나도 소용없다.
내가 하나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몰랐던 것이 위로가 된다. 당연하다. 공부로 되는 문제가 아니고 연구하고 노력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다.
시편에 주의 광명 중에 광명을 본다는 말이 있다. 그냥 보면 되지 않는가? 아니다. 보는 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빛을 주셔야 된다. 이 빛 가운데서 보는 것이다.
나는 이 반전의 순간에 다 설명할 수 없는, 우리가 다 모르는 비밀한 은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다. 학교에 가서 공부를 배우는 것은 별로 놀랍지 않다. 머리 좋으면 잘 알아듣고, 머리 나쁘면 잘 알아듣지 못하는 차이이지 다 알아들을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다. 나는 정말 지지리도 못 알아들었다. 너무너무 못 알아들었다. 속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하나님 말씀을 이렇게 못 알아듣는 줄을 알면 목사님께서 나를 교회에서 쫓아내실 거라고 생각했다.
여기 양문회 형제들이 있는데, 나를 보고 위로를 받으시기 바란다. 내가 양문회 때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데 어떻게 이렇게 못 알아들을 수가 있는가? 목사님 말씀에서 특별히 못 알아듣겠는 부분이 교회를 말씀하실 때 모르겠다. 목사님이 교회를 말씀하시는데 내가 볼 때는 그냥 이것이 교회다. 건물도 있고 십자가도 있고 우리 교회가 교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보면 교회가 너무너무 좋은 것이다. 내가 볼 때는 별 것이 아닌데,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교회는 너무 영광스럽고 너무 빛이 나서 정말 눈부시게 찬란하게까지 묘사를 하신다.
정말 나도 그것 좀 보고 싶은데, 나도 형제자매를 그렇게 보고 싶은데, 목사님이 보시는 것처럼 나도 형제자매들을 보고 싶은데, 교회를 그렇게 보고 싶은데, 그 온전한 교회, 하늘에서 내려오는 단장된 신부와 같은 교회를 나도 보고 싶은데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하루는 하지도 않는 기도를 혼자서 했다. ‘하나님 교회를 보여주세요.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교회를 죽기 전에 단 한번이라도 보게 해주세요. 단 한번이라도 좋으니까 보고 싶습니다.’하고 기도를 했다.
내가 학생들에게 이야기한다. 말씀을 듣는 것은 오징어 뒷다리 씹으면서 듣는 것이 아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 간절한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 하나님 제게 오늘도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 말씀을 듣게 해주십시오. 우리에게 이런 은혜를 베푸셔서 말씀을 알아듣고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하다.
제자들의 눈에 새로운 것이 보였다. 아~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있네. 살아있네, 분명히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살아있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뭐가 새로 시작되네. 이제 완전히 끝났어. 내 인생은 끝이야. 하나님이 와도 안 돼.
그런데 뭐가 지금 새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완전히 반대가 된 것이다. 아래가 위가 되고, 죽은 것이 살아나고 산 것이 죽은 것이 되었다. 아래가 위가 되고 위가 아래가 되었다. 세상이 뒤집어졌다.
어떻게 된 것인가? 분명히 내가 죽었다고 했는데 산 것이었다. 내가 죽었다고 한 것이 산 것이고, 살았다고 한 것이 죽은 것이었다.
새로운 세계가 시작된 것이다. 제자들이 다른 생명이 보여진 것이다. 내게는 내가 원래 가지고 있던 생명은 옛 생명이었다. 옛 생명이 끝나고 예수님이 살아있음이 보여지는데, 거기에는 내 생명이 아닌 다른 생명이 있더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새 생명이고 부활생명이다. 새로운 생명, 죽고 다신 난 생명, 영원한 생명이 예수 안에서 제자들에게 보여졌다. 그리고 우리에게 보여졌다. 할렐루야!
부활은 지식이 아니고 경험이다. 자기가 경험하지 않고는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내가 고등학교 때 선생님의 인도를 받고 교회에 왔다. 나를 인도한 선생님이 학생들을 많이 데리고 왔다.우리 반의 20~30명은 왔다가 간 것 같다.
그런데 다 가버리고 나만 남았다. 왜 갔는가? 사람들이 별 볼이 없어 보이고 시시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그때는 건물도 시시하고 다 시시해 보인다는 것이다. 내가 대학교에 들어갔을 때 내 친구가 나를 따라와서 네가 다니는 교회 같으면 가보고 싶다는 것이다.
친구가 보기에 내가 친구보다 조금 더 공부를 잘했다. 나한테 하는 말이 실망했다는 것이다. 네가 이런 교회를 다니는 줄 몰랐다며 실망했다는 것이다. 아주 실망스러웠던 것 같다.
그런데 왜 나에게는 형제자매들이 시시해보이지 않고 보잘 것 없어 보이지 않고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을까? 왜 나는 평생 여기에 이 형제자매들과 함께 한 가족으로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그 생각이 들었을 때 내 마음 안에 기쁨이 샘솟듯 했을까? 나는 그것이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라고 생각한다.
여러분들은 그 비밀을 아는가? 물론 이것은 부활의 경험은 아니다. 그냥 내 친구들이 시시하다고 했지만 내 눈에는 시시해 보이지 않았고 나는 좋아보였다. 내 친구들은 떼려치우라고 했지만 나는 여기에 내 인생을 걸고 싶었다.
이것이 보통 일이 아니다. 작은 일이 아니다. 아담은 선악과가 좋아보여서 먹었다고 한다. ‘좋아 보이니까 먹어야지.’ 한 것이 아니고, 좋아 보이면 내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부러우면 지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좋아 보이면 내 안에 들어와 있다.
내가 형제자매들이 좋아 보였다. 목사님이 좋아 보였다. 그래서 같이 살게 되었다. 내 안에 들어와 있다.
나는 교회에 오기 전에 내가 꽤 잘났다고 생각했다. 바벨탑을 쌓는 곳에서 꼭대기는 아니라도 제일 1층은 아니지만 2층이나 3층 정도는 될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하면서 스스로 우쭐해하면서 살았다.
교회에 와서 내가 만난 하나님은 나를 좁은 길로 인도하셨다. 실패하고 망했고 안 됐다는 것이 아니다. 안 된 것이 없다. 다 잘됐다. 여기에 서 있으니까 잘된 것이다.
다 잘됐는데, 하나님은 나를 좁은 길로 인도하셨다는 것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구나. 나는 아무것도 없구나. 이것을 알게 하셨다.
나는 지금 육체적인 것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나의 표면이 아니고 나의 내용이 그렇다는 것이다. 단번에 한 것이 아니고 조금씩 조금씩 아주 서서히 하나님이 내게 보여주신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눈을 뜨게 했고, 내 귀를 열어주었다. 하나님이 내 눈과 내 귀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셨다. 나는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된 것이다.
여기에 앉아 있다는 것은 기적이다. 도대체 왜 여기에 앉아있는가? 여기서 말씀을 알아듣는다는 것은 더 기적이다. 졸고 있어도 기적이다. 말씀을 알아듣는다는 것은 더 기적이다. 그런데 ‘아멘’ 한다는 것은 더더욱 기적이다. 졸다가 ‘아멘’ 한 마디 하면 된다.
거짓, 헛된 것만을 보던 나에게 하나님이 나에게 진실을 보여주셨다. 죽은 것이 산 것이었고, 산 것이 죽은 것이었다. 내가 좋다고 생각했던 것은 쓰레기였다. 내가 좋지 않다고 생각하고 피하고 도망가고 싶었던 것, 내가 지우고 싶었던 것이 정말 내게 소중한 것이고 나를 살리는 것이었다.
세상과 완전히 반대되는 세계를 만났고 그것을 보게 되었다. 세상에 살던 나는 끝이 나고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 된 것이다.
나는 태어나서 쭉 자라서 얼굴이 이렇다. 누가 봐도 굉장히 무뚝뚝하다. 어떤 사람은 맨날 웃으라고 한다. 이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것이 웃는 것이다. 나는 예전부터 똑같은 이 사람이다.
그런데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라고 말하고 선포하고 이 자리에 선 것이다. 나는 이 사람을 무엇이라 부르는가? <하나님 말씀으로 지어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이름 지었다. 목사님이 자신을 하나님으로 지어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어디에 써놓으셨다. 그것을 보는 순간 눈에 번쩍 뜨이면서 와~ 멋있다.
하나님으로 인해 지어진 새로운 피조물.
하나님 말씀으로 인해 지어진 새로운 피조물.
사실 아닌 것도 많은데 다 떼려치우고 다 잊어버리고 화장실 가서 물 내려 버리고 나는 <말씀으로 인해 지어진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것만 붙잡고 이것만 말하고 이것만 표현하고 이것만 생각하고 이것만 꿈꾸고 이것만 살기로 작정하였다.
부모님이 내 육체를 낳아주셨지만 하나님 말씀은 나를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낳아주셨다. 우리는 모두 새로 태어난 사람들이다.
전도는 멱살 끄집어서 교회에 데려다놓는 것이 아니고, 가서 성경공부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낳는 것이다. 우리는 낳고 낳는 세계로 불리워진 것이다.
오늘 성경 본문에 성령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요20:22).”고 하셨다. 실제로 그 장면을 상상해보면 좀 우스울 것 같다. 어떻게 훅~ 하면 성령이 들어오는가?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니 사람이 산 혼이 되었다고 했다. 살아났다고 한다. 흙에 생기를 불어넣었다고 했는데, 이 생기가 하나님의 숨이었다.
하나님도 숨을 불어넣으셨다. 예수님이 부활한 다음에 또 숨을 불어넣었다. 숨이 무엇인가? 하나님 따로, 숨 따로 인가? 그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여기에 있고 숨이 가서 사람이 된 것이 아니다.
숨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생명이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숨이고 하나님의 영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우리 안에 오실 때 성령의 형태로 오신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안에 하나님과 예수님이 들어오시면 그것이 바로 성령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이 우리 안에서 빛처럼 돌아다니겠는가? 우리의 인생 안에서 그 성령은 우리의 생명이 된다. 내 생명, 나를 살아있게 하는 것,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 그 생명이 된다.
이 성령은 절대로 귀신같은 것이 아니고 바로 예수님 자신이었다. 깨를 짜면 기름이 나온다. 깨가 없는데 기름이 나오겠는가? 깨가 있고 깨를 짜니까 기름이 나오는 것이다.
예수님이 있고 예수님의 영이 있다. 예수님이 없는데 성령이 따로 있겠는가? 깨를 한 사발 두 사발 먹기는 힘들다. 그러나 깨를 짜면 기름은 비빔밥에 비벼서 아주 고소하게 먹을 수 있다.
예수님의 육체는 우리와 별개이고 하나될 수 없고 연합할 수 없지만 예수님의 영은 우리에게 흘러 들어와서 내 생명이 될 수 있다.
이 예수의 영! 이것이 바로 예수의 본질이고 생명이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실 때, 깨가 짜여져서 기름 한 방울이 나오듯이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짜여지고 짜여져서 한 방울 기름으로 나온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참 사람의 위치이고 자리이고 예수님의 인격이다. 그것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것이고, 우리가 그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라고 했는데, 세례는 침례를 말한다. 침례라는 것은 푹 잠기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 물에 푹 잠기면 어떻게 되는가? 죽는다. 물에 들어갔는데 배꼽밖에 오지 않는다면 수영하는 것이다. 그런데 푹 잠기는 것을 말한다.
완전히 잠기면, 우리가 십자가의 운명 안에 완전히 잠기면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죽게 된다. 내 성질 좀 죽이자. 이것을 하고 싶은데 참고 내려놓자. 이것이 내 십자가야. 이것은 내가 견디어야지. 물론 이런 것도 다 좋다.다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예수님과 함께 죽으려면 예수님은 물밑에 있는데 나는 물 바깥에서 감상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그 십자가 운명 안에 완전히 잠기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바로 성령 세례이고 성령 침례이다.
성령 침례의 목표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과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신비한 무슨 능력과 은사와 받기 위해서 성령으로 침례하는 것이 아니다. 숨이 코에 붙은 인생, 오늘밤이라도 하나님이 오라시면 감사하고 갈 수밖에 없는 그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성령 침례를 받는 것이다.
이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이다.
부활한 예수님이 40일간 제자들과 함께 하며 말씀하셨다고 되어있다. 40이라는 숫자가 의미가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40년간 광야생활을 거쳐서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예수님은 40일 광야에서 주리신 후에 마귀를 물리치고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셨다.
40일은 그것이 종착지, 목적지가 아니고 어딘가로 목적지로 가기 위한 과정이고 단계이다. 그래서 시련과 연단이 있는 곳이고 기간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 교회도 역사가 40년 정도 된 것으로 알고 있다.
40일간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사람들로 준비되고 있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오셔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이스라엘은 언제 회복되느냐고 묻는 제자들, 아무것도 모르는 그 제자들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있는 사람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자기 안에 잠기게 하셔서 자기를 넣어주셔서 그 사람들을 준비시켰다. 우리도 지금까지 짧든지 길든지 준비되어 왔다고 생각된다.
예수님의 생명이 제자들에게 분배되었고 우리에게도 예수님의 생명이 분배되었다. 지금도 분배되고 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준비되어져 가고 있다.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하고 있는가? 우리 한 사람 행복하게 잘 먹고 잘살기 위한 것인가?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갈망이고 전 세계 초점인 바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난 나라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확장이 바로 하나님 나라이다.
제자들이 이스라엘 나라가 언제 회복되느냐고 물었는데, 예수님이 너희는 나의 증인이 되리라고 하고는 승천해서 올라가버렸다. 제자들이 굉장히 황당했을 것 같다. 이스라엘이 언제 회복되느냐고 물었는데, 너희는 나의 증인이 될 것이라는 것은 동문서답이다.
하나님의 최종적인 목표인 하나님 나라는 언제 이 땅에 세워지는가? 그것은 우리가 예수의 증인이 될 때다.
증인이라는 말은 ‘되풀이해서 말하다.’, ‘입증하다.’는 뜻이라고 한다. 새겨진 것을 기억해서 말해낸다. 그래서 복원하고 복구하는 것이다. 무엇이 있었는데 그것이 내 안에 들어와서 지금은 없다. 내 안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서 다시 만들어낸다는 뜻이 증거라는 것이고 증인이라는 뜻이다. 앵무새처럼 자기가 모르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에게 새겨지고 심겨진 생명으로 표현하는 것이 증인이다.
예수의 증인은 예수님을 자신의 생명으로 살아내는 살아있는 간증이고 표현이고 예수님의 복사판인 것이다.그래서 예수님을 재현하고 재건해내는 것이다.
예수님은 2천년 전에 왔다 가시고 지금은 없다. 하나님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 양문회 학생들이 제일 많은 질문 중에 하나가 하나님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는지 예수님이 어디에 있는지,그것을 우리가 이 땅위에 보여주고 나타낼 사람들이다. 이것이 예수의 증인이다.
아들이 아버지의 보증이고 증인이다. 아들은 무슨 증명서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아들 자신이 아버지의 생명을 가지고 있으니까 아들이 아버지의 증인이다.
내 아들 영*이가 내 보증이고 증인이다. 영*이 얼굴을 딱 보면 나다. 영*이가 부끄러운지 엎드린다. 영*이 태도나 자세를 보면 그냥 나다. 뒷모습만 봐도 나다. 누가 가르쳤는가? 내 생명이 그 안에 심겨져 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주님의 증인이고 보증이다. 주님이 죽고 다시 사셔서 하신 것은 무엇인가? 우리의 생명이 되셨다. 주님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당당히 당연히 마땅히 자신있게 주님의 보증이고 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새는 새의 생명이 있어서 날아가고, 물고기는 물고기 생명이 있어서 헤엄친다.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이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고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
어떻게? ‘어떻게?’라는 것은 없다. 그 생명이 답이다. 새가 나는데 ‘어떻게?’가 있는가? 새이니까 난다. 물고기이니까 헤엄친다. 사람이니까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
이것을 위해서 주님이 오셨고, 주님의 모든 과정을 거쳐서 우리에게 생명이 되셨다. 주님이 우리에게 생명이고 우리는 그 생명을 살아내는 주님의 몸인 것이다.
우리는 우편배달부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했다. 우리는 일을 하는 심부름꾼이나 종이 아니고, 생명의 아들이다. 주님과 한 생명이고 주님을 따르는 자고 주님과 연합한 자다.
하나님 나라는 무엇인가? 바로 예수의 증인들이다. 예수님은 이 나라가 이 땅위에 서기를 간절히 바라셨고, 마지막 말을 남긴 곳이었다. 우리도 지금 이 나라가 확장되기를 바라고 있다.
예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죽고 다시 사셔서 하늘에 오르셔서 하나님 보좌우편에 앉으셨다. 예수님은 일을 다 마치셨다. 이제 또 예수님 무엇을 해 주실 것인가요?, 하고 물으면 안 된다. 이제 우리가 움직여야 된다. 이제 우리가 행하여야 된다.
이것이 사도행전이다. 사도행, 사도들이 움직인 것을 쓴 것이다. 예수행전이 아니고 성령행전도 아니다. 사도들, 즉 우리들의 행전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오르셨다는 것은 영광스럽게 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사셨을 뿐만 아니라 지극히 영광스럽게 되었다. 가장 높은 곳에 오르셨다.
영광스럽게 되셨다는 것이 제자들의 눈에 보인 것이다. 그의 부활만 보인 것이 아니고 승천이 보인 것이다. 진실함만 보인 것이 아니고, 그가 영광스럽다는 것이 보였다.
이것이 제자들을 움직이게 한 힘이고 권능, 즉 권세와 능력이다. 영광을 보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다. 이제 우리가 움직여야 할 때가 왔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주님은 우리의 생명이 되셨다. 예수님은 승천하심으로 주님은 우리의 권능이 되셨다.부활승천하신 주님은 우리 안에 생명이 되시고, 또 보좌우편에 앉아 계신다.
우리 안에 부활 생명이 우리를 살아있게 하고 움직이게 한다. 영광스러운 주님이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고 벅차게 한다.
주님의 진실함으로 더 잠기기를 원하고 주님의 영광이 더 밝히 보이기를 원한다. 예수님이라는 씨가 뿌려져서 제자들이 사도가 되고 교회가 되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주님의 씨가 뿌려졌다. 이제 그것이 자라서 열매를 맺지 않는가!
우리는 교회 안에서 단체적으로 많은 열매들이 추수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 열매가 다시 씨가 되어서 이제 이 부활생명이라는 씨를 세상이라는 밭에 뿌려야 할 때이다.
이 시대적 전환기에 우리는 서 있다. 내가 양문회 학생들에게 눈을 크게 뜨고 봐라. 지금 중요한 순간에 왔다.영화가 끝나가고 있다. 지금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야. 이것을 놓치면 영화를 다 놓치는 거야. 지금 눈 크게 뜨고 봐라. 내 자신에게 한 말이다.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어디로 움직이시는지, 우리를 어떻게 움직이시는지, 주의 깊게 보기를 원한다. 주님이 우리에게 씨를 뿌리셨고, 이제는 우리가 세상에 씨를 뿌려야 할 때다.
씨는 완전하다. 우리가 손에 쥐고 있는 씨가 정말 완전한 것인가? 이 부활생명이 정말 완전한 것인가? 아멘! 할렐루야!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신 주님을 찬양한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 썩어져 없어질 인생들이었다. 불손종과 거역으로 인생을 절망과 저주와 원망 가운데 살 사람들인데, 주님이 부르시고 찾아오시고 인도하셔서 당신의 생명으로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거듭나게 하셨다.
그리고 영광을 보여주셨다. 이제 주님이 우리를 자신의 생명을 살아내는 생명으로 불러주신 주님을 찬양한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불순종과 거역으로 옥에 갇혀있던 우리들을 주님께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육신에 매여 일생을 종노릇할 우리를 주님께서 회복해 주셨습니다. 늘 뒤돌아보고 머물기 원하는 우리를 주님 자신 안으로 이끄시고 또 이끄셔서, 주님 안에서 완전히 끝나게 하시고 다시 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십자가 주님의 진실이 우리의 생명이 되었고, 보좌우편 주님의 영광이 우리의 권능이 되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주님이 주신 이 기회, 우리가 주님을 우리 자신으로 표현하고 증거하고 살아내는 영광스러운 이 직임 안으로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의 생명의 증인으로 살아가기 원하고, 하나님의 갈망을 이루는 저희들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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